| 기사등록일 | 2009-1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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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제호수 | 230호 |
선문학술문학상
※ 당선작
▣ 논문 : 이강희(국제유엔 03) '로스토우의 근대화론과 미국의 대외정책'
▣ 단편소설 : 강병규(국어국문 04) '도미노'
▣ 영상 : 심현주, 신지은, 최수연(언론광고 07) '행복을 싣고 달립니다'
▣ 수필 : 윤하늘(국어국문 08) '죽음이라는 가족'
▣ 시 : 유효관(통일신학 06) '시골집'
▣ 사진(일반인 부문) : 김우철(언론광고학부) '자로(自路)'
▣ 사진(학생부문) : 최성운(통일신학 03) 'Global University',김원진(일어일본 02) '흉유성죽(胸有成竹)'
※ 가작
▣ 시 : 이준호(역사 02) '심해'
▣ 영문에세이 : 김난홍(영어 06) 'What Korea is to Koreans'
(국어국문 04) 작품을 내고 난 뒤, 한동안은 아쉬움에 시달렸고, 한동안은 부끄러움이 나를 지배했다. 조금만 더 썼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과 어떻게 내가 글을 내겠다고 생각했을까 하는 후회였다. 아직도 여운이 많이 남아있어서 그런지, 당선됐다는 연락을 받고도 참 부끄러웠다. 그렇게 여러 번을 고쳐 쓰고, 다듬었는데 아직도 더 다듬고픈 작품이 신문에 실린다니. 맙소사. 국어국문과라면 거의 대부분은 선문문학상에 도전하겠다는 했던 꿈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꿈을 지금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신과 먼 일이 되었다며 외면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가 수업시간에 들었던 것은, 어떤 전공과목을 불문하고 같은 내용을 요구한다고 느꼈다. 다들 잘 알다시피, 저 뒤에는 무엇이 있을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알려고 하는 노력이 바로 그것이다. 불안감 때문에 가지 못한다면, 그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고, 익숙해지면 되는 일이다. 난 그저 남들보다 한걸음 내딛었을 뿐이다. 나를 봐라. 조금 더 가봤는데 죽지는 않은 것 같다. 언제나 진취적이기를 바라는 국어국문학과 교수님들에게 감사드린다. 방학동안 소설을 쓰는 요령들에 대해 이야기 해준 국어국문학과 '김정화 조교님'(본인이 꼭 써달라고 했다)감사드린다. 심적 물적으로 가난한 나에게 풍요를 안겨준 '곽민정'양 고맙다. 그리고 그 외 기타인물들아! 밥 사라고 하지 마라! 읽은 만큼 생각할 수 있다 손종업 교수 (국어국문) 우리는 약하니까 소설을 쓴다. 소설을 통해서 작고 좁고 어두운 우리들의 삶에 대한 위안을 찾고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꿈을 꾼다. 이 지상에서의 삶은 이미 무수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가란 그 이야기들을 재료 삼아서 좀더 오래 지속되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빚어내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응모작이 물경 17편이라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기뻤고, 한편으로는 당혹스러웠다. 그토록 많은 학생들이 가슴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품고 또 그것을 글로 풀어내려 한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여전히 청년으로서의 뜨거운 열망이 존재한다는 것의 징표이니 기쁘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그 대부분의 것들이 이야기 자체로부터 온 것이거나 소설 이전의 조잡함에 머물러 있다는 점은 아쉬웠다. 예심을 거쳐 7편의 소설을 골라냈다. 마법에 의해 세 가지 소원이 이루어지게 된 한 인물이 겪는 사건을 그린 '만우절'이라든가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한 복수극을 다룬 '미쳤다'는 읽는 재미는 있으나, 사건이 개연성이 떨어지고 인물 설정이 비현실적이었다. '숨'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긴장감 없이 제시되고 있는 반면에, '나의 마리를 위해'에는 무언가 더 극적인 사건이 필요해 보였다. '열병'은 오렌지 식당에서 필리아에 이르는 낯익은 공간에서 생겨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반가웠지만, 언어의 밀도가 약한 게 흠이었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이 어느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 '심애'와 한 인물의 눈에 비친 암울한 현실을 그린 '도미노' 두 편이었다. '심애'는 오래 가다듬어진 섬세한 언어가 돋보였다. 그러나 그들로 하여금 15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서야 만나게 한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해서 아쉬웠다. '도미노'에도 마땅치 않은 부분이 적지 않다. 소설이 이야기의 일종이라면 좀더 구체적이고 긴장감있는 사건들이 제시되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택한 이유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진지한 태도와, 무엇보다도 그의 언어들이 지닌 이 세계에 대한 깊은 감수성 때문이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나머지에게는 가야 할 길에 대한 축복을 보낸다. 누구든지 더 많이 읽어야 하리라 여겨진다. 어느 소설가가 말하지 않았던가. 남과 같은 것을 읽으면서 남과 다른 생각을 할 수는 없는 법이라고. 강병규
(국어국문 04) 도 미 노 1. 멀리서 보면, 이 아파트라는 건축물에서는 무수한 생명들이 내는 불꽃들과 마주친다. 어떤 집에서 방금 전에 불이 켜졌다. 누군가 방금 외출에서 돌아온 것이리라. 아마 내가 보지 못한 어느 순간에 다른 집에서는 불이 꺼졌을지도 모른다. 혹은 불이 켜지는 것을 한동안 보지 못한 집도 있으리라. 마치 누군가 자신을 도와달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기도 한 불빛들의 반짝임의 연속. 하지만 이곳에 살다보면 대개 사람들은 그런 조난신호쯤에는 무관심해지는 게 보통이다. 나는 까마득한 높이의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길게 숨을 내쉰다. 저 거대한 괴물도 나를 노려보고 있으리란 생각을 하면서. 아주 잠깐 저 거대한 괴물이 삼켜버린 누군가의 목적을 잃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했다. 그 눈빛이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였다. 그 어딘가에서 또 하나의 생명이 사라졌는지, 구조신호를 뒤늦게 알아차린 구급차 한 대가 급하게 들어서더니 나를 지나쳐서 가까운 동 앞에 멈추어 선다. 저 붉은빛은 지나가던 모두를 주목하게 만든다. 하지만 등대처럼 누군가의 앞을 비춰주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뒤안길을 위한 신호다. 여인들 몇이 서서 귓속말을 주고받는다. 한 달 전부터 악취가 흘러나왔대. 글쎄. 아휴, 끔찍해. 잠시 후에 구조대원들은 오래 방치되었던 노인의 주검을 들것에 싣고 나왔다. 누군가는 그 노인에 대해서 조금 알았던 것을 자랑삼아 그 노인의 과거와 현재를 이야기 하고, 다른 이는 시체가 나온 영향 때문에 아파트 값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조금 인간미라는 것이 남아있는 사람은 전화를 꺼내어 그들 부모에게 연락을 한다. 우스운 일이다. 시체를 보고 자신의 부모를 떠올리다니, 좀 좋은 일을 계기로 연락하면 좋을 거란 생각은 없나보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충격적인 사건이야말로 다 죽어가던 아파트에 강한 생명력을 주며,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도록 쥐어짜내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사건이라도 일어나야 주변에 누가 살고 있는지 조금은 알게 되니까. 단지 그뿐이다. 그렇게 쥐어짜낸 영양분을 가지고 각각 자신들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면, 아파트는 그렇게 각각의 번호를 매긴 집에서 양분을 착취한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옆에 누가 있든지 간에 열심히 자신만의 공간에 몰두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소란이 사라지면 몇 명의 이야기꾼들은 그 사라져 가는 소란을 담아서 다른 인근 아파트에게 미음처럼 흘려 넣어 준다. 그러면 그 아파트도 당분간은 모두에게 관심 있는 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음이 떨어지면 그들은 또 다른 양분이 오기 전 까지 깊은 무관심의 안대를 끼고 다시 살아 갈 것이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서 구급차가 사라지고, 사이렌소리도 희미해진 뒤에 나는 다시 천천히 걸어서 내가 살고 있는 103동으로 들어왔다. 많은 숫자들을 거쳐 오면서 느끼는 감정은 단지 온몸에 감겨오는 듯한 불쾌함뿐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냄새보다 죽어가는 신음이 풍겨나는 이곳에서 10년 넘게 살아오다니, 난 죽어가고 있거나, 방금 전에 실려 간 낯모를 노인처럼 이미 오래된 송장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내가 이미 이 아파트에 모든 양분을 빨려 썩어 문드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기 전까지, 나조차도 내 죽음을 모르리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의 식도를 거꾸로 타고 올라가 꼭대기인 14층에서 멈춘다. 내 집은 1404호. 그곳의 문을 열고 언제나 그렇듯 나보다 먼저 들어와 있는 어둠을 걷어냈다. 집 안의 조용함을 TV로 달래고 밥 먹을 준비를 한다. 먼저 차지하고 있던 자리의 주인이 사라지자, 집안에 남은 싸늘한 기운에 대해서 가능하면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쓴다. 그래도 어떤 생각들은 꾸역꾸역 빈틈을 찾아 올라온다. 삼년 전에 나의 동거인들은 불시에 세상을 떠났다. 안개가 지독하게 낀 도로는 자신이 마땅히 보여줘야 할 길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충분히 위험했고, 그것을 더욱 감추려하는 어둠이 내린 도로는 그 이상으로 위협적이었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또 아무도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그들이 타고 있던 차도 그러했다고 한다. 작은 접촉사고는, 전혀 작지 않은 사고로 이어졌다. 졸음운전을 하던 거대한 덤프트럭 운전자의 판단은 너무 늦었고, 그들은 너무 빨랐다. 화염이 솟구쳤다. 그들이 왜 거기에 끼어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런 생각 속에서도 항상 해왔던 반복된 동작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쯤 되면 기계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모습이다. 상을 펴고, 밥을 퍼다 그 위에 올려두고 신 김치와 짠지 같은 걸 대충 꺼내놓고서 TV를 응시하며 그렇게 맨밥을 먹는다. 그야말로 자린고비의 식사다. 밥 한번 먹고 TV한 번 보고를 반복한다. 이 아파트가 나를 죽이지 못하게 하려면 식사는 결코 멈추어선 안 되는 최소한의 행위인 셈이다. 이러한 식사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반찬을 내가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채널을 이리저리 돌릴 수는 있지만, 결국 누군가가 주는 것만을 힘없이 받아먹을 수밖에 없다. 화면 속에서는 기네스북에 도전하는 어떤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떤 것은 흥미로웠지만 어떤 것은 어이가 없었다. 리모컨을 눌러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뉴스였다. 오늘 국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정치판인지 격투기인지, 무슨 공성전 공방을 보는듯한 그들만의 리그를 보고 있으니 밥맛이 떨어진다. 저들이 내 밥상의 밥맛조차 좌우하다니, 기왕 던져주려면 맛있는 것을 던져주면 안되나 싶다. 와이셔츠 차림의 한 의원이 손가락질을 하면서 고함을 치고 있다. 그에겐 젊은 내게도 없는 어떤 열정이 남아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 채널을 돌려 버렸다. 도무지 남의 세상 일 같은 것이다. 화면에서는 세계신기록에 도전하는 사람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그녀의 도전 종목은 도미노. 이제 곧 모두 완성되어간다는 리포터의 말과 함께, 그간 노력해왔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흐른다. 이윽고 도전자의얼굴이 화면 가득히 잡힌다. 바로 그 순간에 나는 숟가락을 놓친다. 땡그랑. 내 속에 있던 무언가가 도미노처럼 쓰러져 가며 내 위로 올라온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기 전에 먼저 헛구역질이 나오기 시작한다. 잘못 먹은 반찬을 밀어내려는 노력. 나의 미감을 자극시키던 그 반찬은 나에게 독이었다. 그건 문제가 많은 반찬이다. 하필이면 그녀의 모습을 이렇게 만나야 하다니. 십여 년 전 어느 가을날 밤의 풍경이 토사물과 함께 떠올랐다. 2. 나는 말없이 반대편 차선의 차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차들 중에는 분명 내가 떠나온 그곳으로 가는 자들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하행선 차들에 내 그리움을 실어 보냈다. 빠르게 멀어지는 저 차들 중에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내 시선을 알아차리고, 내가 던진 감정들을 잡아서 어디론가는 가져다 줄 사람이 있을 것도 같았다. 나는 빠르게 다가왔다 사라지는 불빛들을 빠짐없이 바라보았다. 사실 나는 차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원하는 곳을 빠르게 간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 사이에 놓여있는 세상을 무감각하고 빠르게 지나쳐버린다는 점이 내겐 묘한 상실감을 느끼게 했다. 특히 고속도로라는 것은 정말 싫었다. 단지 빠르게 가는 것이 그 도로의 목적이다. 때문에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는 이 도로를 마냥 바라봐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난 차에 타면 언제나 이 지루함 덕분에 잠을 자게 되었고, 덕분에 길의 시작과 끝만 기억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차마 잠들 수가 없었다. 어두운 길 위에 빵조각을 던져두어 돌아갈 길을 표시하는 어느 동화 속의 소년처럼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렇게 지나가는 모든 것을 기억했고, 모든 느낌들을 흘려놓았다. 언젠간 다시 돌아가리라 다짐하면서. 운전석에서 운전을 하고 있는 아버지는 말을 아끼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한동안 대화가 없던 우리 부자였다. 하지 않던 행동을 갑자기 하려고 하면 당연히 어려운 법이다. 쉽게 말을 주고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 당연하다. 입을 열기를 포기하고, 내 옆에 있는 내 짐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살아온 날이 많지 않음을 증명하듯 내가 어머니 집에서 가져나온 짐들은 옷가지와 책, 그리고 어머니가 헤어지면서 주셨던 장난감이 전부였다. 내가 가지고 온 물건들은 나에게 아무런 기념이 되지 않고, 슬픔을 자아내었다. 쳐다보기 싫어진 짐들에서 눈을 돌려 다시 창밖을 보았고, 그곳엔 서울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적힌 문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서울에 들어가기 위한 통행료를 지불하셨다. 이상한 동네라는 생각이 든다. 이 서울이란 곳은 들어가서 살기 위해선 돈을 받는구나. 커다란 문을 지나고, 복잡한 도로들을 지나니 억지로 자라고 있는 나무와 억척같이 커가고 있는 나무들 위로 거대하게 솟아나 있는 건물들이 보였다. 그 건물 중 하나에 들어갔고, 몇 개의 버튼 조작으로 14라는 숫자가 보이자, 난 아찔한 허공에 서 있을 수 있었다. 철문을 열고 들어가니 처음 보는 여자가 굳은 표정으로 나에게 인사를 했다. "어서 오렴."이라는 4글자로 나를 무겁게 깔아 뭉개왔다. 반갑다는 인사가 한여름 습기를 가득 머금은 더운 바람처럼 나에게 불어왔다. 나를 밀어내려는 성질도 없었고, 그렇다고 나를 받아주려는 느낌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불어왔다. 이 아파트라는 건물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 건물에서 느껴진 감정. 그것이 눈앞에 여자에게서도 느껴졌다. 단단한 벽에 구멍을 내놓고 나를 살펴보고 있다는 생각이……. "인사해라. 이제부터 엄마라고 부르고 말 잘 들어야한다." 라며 아버지에게서 일방적인 통보가 내려왔다. 아. 엄마, 그 이름을 빼앗은 사람이 저런 사람이라니, 동화에서 보던 그 계모라는 사람이 내 눈 앞에서 나타나자,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엄마라는 사람은 정말 쉽게 바뀔 수 있으며, 또 누가 돼도 상관없는 존재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난 한꺼번에 밀려오는 두려움들이 무서워, 나도 모르게 그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내 주위에 벽돌을 쌓아 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내 시야에서 완전히 밀어내, 그들을 의식하지 않게 될 수 있었다. 새로운 곳에서 전혀 다른 사람들과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땅이 아득히 멀어 아찔한 이 아파트와 어머니의 향기가 나지 않는 저 낯선 여자. 나와 친하지 않은 이 환경은 나를 점점 집의 안쪽 깊숙하게, 나만의 공간 안으로 밀어 넣기에 충분히 위협적이었고, 난 그 힘에 너무 쉽게 굴복하고 말았다. 나에게 할당된 이 위험하고 좁은 공간은 나를 질식시키려고 한다고 느꼈다. 오래 버틸 자신도 없을뿐더러, 이런 숨 막히는 공간에서 죽고 싶지는 않았다. 언젠가 방송에서 보았던 쓰러져가는 도미노들처럼, 나란하게 서있는 이 아파트가 쓰러지면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내가 조금만 흔들어도 무너지면서 모든 걸 부수어버리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보냈다. 몇 년에 걸쳐서 이 새로운 요새를 곳곳의 빈틈을 살펴보며 조금씩 행동반경을 넓혀갔다. 어린 내가 도망칠 곳이 더 이상 없다고 좌절 할 때 쯤. 그때 그녀를 만났다.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의 광장에서. 그녀를 만난 첫날밤에 나는 그런 꿈을 꾸었다. 무너져 내리는 도미노들을 피해 그녀의 손을 잡고 달리는 꿈. 내 또래의 그녀는 이곳에 사는 어떤 사람들과도 달랐다. 이전부터 이곳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굳어있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는 나를 쉽게 흡수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자주 먼 곳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오곤 했다. 난 항상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거짓 어머니를 가진 거짓 가족, 유령 같은 건물들과 서로 알려고 하지 않고, 무관심을 서로 닮아가고 있는 사람들. 마치 하나가 넘어지자 모두 넘어져 버리는 도미노처럼, 누가 시작했는지도 모르고 자신보다 먼저 변해간 사람들을 닮아가는 기계들이 나에게 주는 공포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 동네를 완전히 바꿔 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어쩌면 나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그녀를 부러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마치 마법사처럼 내 주변을 막아선 두터운 벽에서 나를 꺼내었고, 덕분에 난 거부감 없이 맘속의 모든 이야기를 폭발 시키듯 그녀에게 이야기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길 위에서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새어머니가 목격한 후에 모든 게 바뀌었다. 그날 저녁 퇴근한 아버지는 다짜고짜 내 뺨을 때렸다. "이 자식,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어디서 연애질이야. 응?" 다름 아닌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로부터 그런 말을 듣는다는 게 가슴이 아팠다. 그녀의 어머니가 술집을 하는 여인이라는 이야기도. 술집을 하는 여인의 딸이 가진 도덕적 책임은 그런 것일까. 그 후, 나는 다시 좁은 공간에 나를 가두고 벽을 쌓는 일에 몰두했고, 언젠가 도미노처럼 무너져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 떨면서도 조금씩 그녀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서로 다른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부터는 피해 다닐 정도였다. 가끔 길에서 마주치면 나를 잡으려 반가운 얼굴로 미소를 던지는 그녀와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도망치는 내 모습이 반복되었다. 매번 그렇게 황급히 그 눈길을 외면하며 도망치기 바빴다. 그리고 그녀가 보이지 않게 되면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슬픔에 젖어들었다. 그렇게 나의 도주행각은 길었고, 길어진 뒷걸음질만큼 그녀의 기억속의 나도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으리라. 어느 날부터인가는 그녀도 말없이 나를 스쳐지나갔고, 또 어느 순간에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내 기억의 밑바닥에 그녀는 단단한 벽돌 같은 걸로 굳어져버렸다, 그걸 빼낸다면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3. 가득차서 넘쳐 오르는 하수구의 오폐수처럼 뱃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른다. 먹던 음식물들이 뒤섞인 토사물, 머릿속 구석구석 잘 감춰두었다고 생각했던 당시의 기억들과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당시의 단단하고 차가운 기억의 조각들. 모든 것이 한 번에 서로 먼저 나가겠다고 터져 나오고 있다. 항상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십년 넘게 보이지 않던 곳에서 썩고 있던 기억들이 독이 되지 않을 리가 없다. 반가운 얼굴을 봤다는 즐거움을 단번에 압도해 버린 좋지 않은 추억. 그것은 한참을 내 안에서 일렁이다가 의문이라는 작은 응어리로 머릿속으로 치고 들어왔다. 왜 그녀가 도미노를, 그것도 수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그것을 하고 있을까? 그녀는 내가 말한 내용을 충분히 이해했다. 나를 흡수하듯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그녀는 그런 행동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비겁했던 내게 복수를 하려는 것일까? 어쨌거나 그녀를 만나서 그 이유를 묻고 싶어졌다. 견고하게 닫아걸었던 내 삶의 문들을 열고 그녀에게 다시 연락 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외국에서 몇 년 살다가 얼마 전에 돌아왔대. 겨우 전화번호를 구했다. 이번에 도미노 하지 않았으면 그나마 구할 수도 없었을 걸." 동창 녀석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곧장 전화를 하기도 어려웠다. 여태껏 내가 그녀에게 했던 행동들에 대한 그럴듯한 변명을 만들어야 했다.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말로 만들려니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며칠이 흘렀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 모든 이유들엔 무겁게 부끄러움만이 매달렸다. 이제 와서 연락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 동안 그녀와 나의 거리가 얼마나 더 멀어졌을까? 그 거리를 생각하자면 내가 꺼려했던 것을 생각 해 봐야 할까. 그녀 또한 그런 일들로 인하여 상처가 너무 커서 더욱 거리를 두고 날 지켜보고 있지는 않을까. 아니면 아예 나 따위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살고 있을까. 애초에 나는 그녀의 삶에서 작은 블록 하나의 의미도 차지하지 못하고 있을 것 같았다. 방송에서는 내일이면 세계에서 가장 긴 도미노 도전이 벌어진다는 짤막한 뉴스가 흘러나왔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전화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무슨 말로 시작하지? 목소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울까? 모든 생각이 전화 속에 집중되었다. 심장박동처럼 들리는 수화음은 내 마음처럼 조급하지도 않고, 또 너무 느긋하지도 않게 관조적인 태도로 날 어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박동이 모두 끝나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껏 멋을 부리고 약속장소에 나갔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은 것 같은 허망감과 함께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차라리 잘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수년 전에 자신을 그렇게 모른척하며 지나치던 사람으로부터 느닷없이 연락을 받으면 그녀의 기분은 또한 어떨 것인가. 그렇게 다시 나만의 껍질 속으로 숨으려는 순간, 거의 울리는 일이 없는 내 방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 벨소리는 특별했다. 매일 듣던 소리였지만,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다. 낯선 번호였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나는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는 전화기 속으로 속절없이 뛰어들었다. 의식할 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로. 그녀는 능숙했다. 어쩌면 전화를 받지 않은 것도 계획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 예전부터 이런 일에 자연스러웠으니까. 쉽게 받아들이고, 빠르게 동화되었다. 누구도 적으로 돌리지 않고, 누구의 미움도 받아본 적이 없다. 노련한 낚시꾼처럼 밀고, 당기고 어르고 결국은 자신에게 다가오도록 하는 힘이 있었다. 잘 지냈냐고 먼저 안부를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나를 재빠르게 낚아채었다. "전화로 이러지 말고, 당장 만나서 이야기 하자." 맑게 출렁이는 목소리였다. 나는 물고기처럼 그녀의 줄에 낚여 올려졌다. 만나서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까. 지난날에 대한 핑계나 구질구질한 변명 따위를 하기엔,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분위기를 망치기 싫었다. 오늘 날씨에 대해 말해볼까. 흥미 있는 요즘의 뉴스에 대해 말해볼까. 아니면 단도직입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먼저 할까. 이미 도마 위에 올라가있는 내 몸뚱이. 국거리가 될지 튀겨질지 아무리 고민해 봤자 칼을 든 주인을 설득 할 수는 없었다. 저 주인은 보통이 아니다. "그동안 뭘 하고 지냈기에 이렇게 연락이 없었어?" 라고 당연한 순서를 밟아오니, 이미 준비한 핑계를 모두 꺼내놓기만 하면 됐다. 되도록이면 어떤 감정도 너무 쉽게 드러나지 않도록 담담하게 말했다. 이정도면 나름대로 견고해보여서 맘에 들었다. 그녀는 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낮은 목소리로 "그랬구나."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 가라앉아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곧 작정한 것처럼 다소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밥 먹으래. 아니면 술?" 분명히 연락한 것은 나인데, 오히려 상황이 역전된 기분이 마구 들었다. 내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 이전에, 내가 가진 내용물을 먼저 다 쏟아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이젠 화장도 하고 약간 멋도 부리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느낌은 같았다. 조금 드세진 것만 뺀다면 말이다. 4.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라며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자신에게 신경써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길 원하는 것 같았다. 사실 난 그를 만나지 못한 동안 항상 생각하고 있었고, 아마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 그를 그리워했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의혹에 찬 표정으로 주저하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물어왔다. "그런데 왜 도미노를 하는 거야? 내가 그걸 싫어하는 것을 알잖아" 그리움보다 궁금증 때문에 나를 만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가 조금은 괘씸해졌다. 비록 중학생 때 이긴 했지만, 그래도 꽤나 친했었다고 난 생각했었는데, 실컷 마음 주다가 먼저 도망간 그를, 내가 왜 여전히 좋게 봐주고 있는 것일까라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너무 화가 난 나는 얄미운 그에게, 결코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고 싶진 않았고, 아무것도 알아주지 않는 그 가슴에 비수를 박았다. "나도 알아."와 "그래서 하는 거야."라는 두 마디의 말이 그를 꽤 충격에 빠지게 한 듯 했다. 표정이 멍한 것을 보니, 상당히 놀란 듯 했다. 그 후에 연이어 쏘아대는 기관총세례를 받고, 그는 연신 표정을 구기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래도 아무런 미동도 없는 것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아직 어느 정도는 나에게 마음을 열고 있다는 뜻 이니까. 그의 표정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해 주는 도구였고, 오랜만에 봤지만 여전했다. 자신의 그런 모습을 모르는 당사자는 점쟁이처럼 생각을 모두 읽어버리는 나를 놀라워했다. 덕분에 가깝게 다가가고,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과거들이 생각났다. 난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를 잘 알고 있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렇다. 그는 항상 내면에 집중했기 때문에, 실제로 자신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몰랐다. 내가 열심히 헤집고 들어갔던 것은 그가 쌓아올린 벽들이었고, 도망치지 않고 싸우게 해 준 것은 그가 무서워하고 싫어했던 것들에 대한 공포였다. 나중에 들었던 이야기이지만, 가정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그에게 새로운 곳에 대한 적응은 참 힘들었다고 했다. 집안의 풍경은 냉담했고, 집 밖에서 만난 풍경도 그에게는 두려웠다. 자신이 조금만 잘못하면 아파트가 기울어서 도미노처럼, 차례대로 쓰러질까 무섭다는 생각에서부터, 건물뿐이 아니라 사람들조차도 다가서기가 너무 힘들었다는 것까지. 그는 연쇄적으로 다가오는 공포들이 두려운 것이었다. 도미노를 싫어한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 같이 찍은 졸업사진만이 나에게 남아 있고, 후에 고등학교는 각자 갈라지면서, 만나게 될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같은 번호의 마을버스를 타게 돼서 만나게 될 때에도 그는 나를 외면했고, 심지어는 미소를 지어 보내는 나에게서 도망치기도 했다. 화가 나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얼마나 보지 못했다고 나를 모른척하다니. 하지만 그 감정은 점점 걱정으로 바뀌었다. 가끔씩 만나게 되는 그의 모습과 혹시라도 마주치면 도망 갈까봐 몰래 지켜 본 그의 모습은, 흡사 그가 싫어하는 것들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들을 닮아갔고, 그것들을 닮아갔다. 계속 변해가다 보면, 자신조차도 도미노처럼 그저 쓰러지기를 기다리다가, 차례가 되면 넘어지기만 하면 되는 한 조각이 될 것 같았다. 단순히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가장 좋은 미끼를 준비해야 했다. 루어낚시처럼 살살 꼬여내기도 해야 했으며, 어떤 미끼처럼 향긋한 냄새를 풍기기도 해야 했다. 일방적으로 연락한다면 덫을 눈치 채고 도망 갈 것이다. 그냥 찾아간다면 만나주지 않을 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서 만나는 데까지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는 나에게 아무런 할 말이 없다며 빨리 자리를 떠나버릴 것이다. 그가 먼저 연락하게 해야 했고, 절실하게 만들어야 했다. 수많은 미끼 중에서 단번에 성공할 수단을 찾아내었고, 기회를 착실히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다 돼간다고 생각 되었을 쯤, 찌가 움직였다. 보기 좋게 성공한 내 사냥의 산물은 내 눈앞에서 반쯤 정신이 나간 듯 보였다. 그도 놀랐을 것이다. 혹은 몰랐을 것이다. 난 계속 말을 이어갔다. 단지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바깥의 모든 것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대하며, 또다시 어디엔가 감쪽같은 벽을 만들고 사라지려 하는 그 행동이 정답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 모두들 그런 식으로 도미노처럼 변해간 것이었으며, 자신 또한 별반 다를 바 없는 몰골이라는 사실이라는 것. 너무나도 싫어하던 그들을 멀리했지만, 그것이 가장 빠르게 변하는 길이었다는 것. 이어지는 말들 앞에, 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직 내가 너에게 희망이었으면 해. 내일 꼭 TV를 봤으면 좋겠어. 거의 다 완성해가거든." 나를 바라보지 못하는 그의 정수리에 나는 작별 인사를 보냈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5. 그렇게 그녀가 먼저 떠나고 난 뒤에, 나는 너덜너덜해진 내 조각들을 추스르며, 여전히 역한 공기를 내뿜는 비석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것들은 다른 어느 날보다도 유난히 더 위압스럽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들이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그 여파로 다른 건물이 또 먼지 속에 쓰러져가는 장면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부르르 온몸을 떨었다. 결국 그녀는 복수를 원했고 그것을 성취했다. 비석들마다 켜져 있는 불빛들은 마치 그곳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이름처럼 군데군데 켜져 있었고, 나도 잠시 후에는 저 안으로 들어가 내 이름에 불을 밝혀야 했다. 현관문이 반가운 듯 헤벌쭉 열렸다. 내 영양분을 빨아들일 생각으로 들떠있는 표정이었다. 저놈에게 먹힐 생각을 하자, 너무 배가 고파졌다. 많은 피를 빨려 죽지 않으려면 나도 무언가를 먹어야 했다. 밥상을 차리고 TV를 틀어, 언제나와 같이 자린고비의 식사를 했다. 오늘도 역시 내가 만나는 반찬들은 다 맛없는 놈들이었다. 그녀의 도미노가 내일이면 완성된다는 소리가 흘러나왔고, 그녀의 인터뷰도 나왔다.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는 말. 쓰러져 가는 블록들을 보고 희망을 얻으라니, 우습지 않은가. 그녀가 쓰러뜨린 블록의 맨 마지막에는 내가 깔려있게 될 것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나를 조롱하고 있었다. 다른 채널을 틀자 한 시위현장이 나왔다. 마치 어제 본 정치판 같았다. 좀 다르다면, 그들이 도미노와 같이 보였다는 것. 전경들은 마치 잘 정리된 블록들처럼 서있었고, 가끔 시위자들을 위협했다. 저들 중 누구 하나를 잘 밀면 모두 쓰러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부터 밀면 다 쓰러지지 않아 모양이 좋지 않다. 반대 방향으로 밀면 시작점으로 갈 뿐이고, 중간에 하나가 어긋나 있으면 쓰러지다 멈춰 버린다. 그것이 도미노이니까. 하지만 질서정연한 쪽 보다 어지러운 쪽의 붕괴가 더 빨랐다. 시위자들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일렬로 밀려오는 방패의 벽과 구석구석 강타하는 물줄기의 모습은, 너울이 몰려와 방파제 위에 있는 사람을 집어 삼키듯 오싹한 광경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 한 평도 되지 않는 창문 밖으로 하나 둘 꺼져가는 집들을 바라보니, 문득 내 차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맞은편 아파트의 풍경에는, 내 앞에 있던 사람들이 쓰러져 가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그들도 자신이 변하는 것을 몰랐으리라. 난 이제 아무것도 바꿀 힘이 없었다. 타인도, 나 자신도. 물론 그럴 용기도 없었기에, 차라리 지하 깊숙한 곳의 카타콤에 숨어 다른 출구를 찾아 헤매고 싶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내 행동으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출구를 찾아 헤매다가, 끝내 죽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서두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모욕을 나에게 주려고 하지 않는가. 당일이 되자 그녀의 도미노는 이제 모두 쓰러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들뜬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특히 도미노가 있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 사는지, 몇몇 낯익은 국회의원들도 몇 모였다. 방송에서는 세계 신기록이라는 것에 대해서, 신나게 떠들고 있었고, 인터넷을 통해 살펴 본 사람들의 반응 역시 대단하긴 했지만, 우스웠다. 저 도미노는 쓰러져가는 서민들을 대변한다는 사람, 어려운 시기에 저 국회의원들은 저기서 왜 놀고 있냐는 의견, 이상한 설문조사들 등. 시끄럽고 무언가가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나는 그곳을 믿지 않는다. 몇 번의 클릭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저 모니터 속의 세상만 주무르는 저들도 이미 다 쓰러진 도미노 블록일 뿐이다. 난 무심하게 그녀가 나에게 준 부패한 약속을 먹고 있다. 독이 될 것을 뻔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죽게 하려 했다면, 마땅히 그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다. 그게 진정 그녀가 원한 것이라면, 저것들이 나를 쓰러트리기 전에, 내가 내 손으로 먼저 그 연쇄작용을 끊어 버리겠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은 나를 양분삼아서 당분간은 자신들 주변에 머물다 간 한 청년의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고, 어떤 이는 아파트의 시세가 떨어질 걱정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멀리 떨어져있는 자신의 자식들에게 안부를 물어보겠지. 조금 더 큰 충격을 주기 위해서 그들 모두에게 보낼 유서를 써보는 건 어떨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녀가 저 화면 안에서 남들 보기 좋은 애들 놀이를 하고 있을 때, 난 그녀가 하지 못한 큰일을 하겠노라 다짐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10초의 카운트다운. 난 작은 종이에 이 사회에 대한 비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한 경고, 그리고 그녀에 대한 작은 원망을 써내려가려 가기 시작했다. 순간 도미노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저것은 그녀가 나에게 내리는 사약이다. 그동안 멀리했던 것에 대한 복수이다.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서서히 무너져가는 블록들을 파도를 타고 , 그녀의 저주가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내 차례가 다가왔다. 그렇게 생각했다. 6. 어떤 사람은 크게 아쉬워했다. 누군가는 허무하다며 투정을 했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음모론을 제기했을지도 모른다. 구경하러 들렀던 국회의원들은 시간 낭비했다는 표정으로, 똥씹은 표정으로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방송사에서는 아쉬운 듯 방금까지의 장면을 되돌려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들고 있던 펜을 놓았다. 도미노는 마지막 한 개의 블록을 남기고 기적적으로 멈추어 버렸던 것이다. 사람들이 지르던 탄성이 아직까지도 환청처럼 남았다. 아마 어떤 사람은 욕을 하면서 채널을 돌렸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은 다시 보여주는 장면을 계속 보며 여전히 아쉬워 할 것이다. 누군가는 TV를 반찬삼아 밥을 먹고 있다가, 밥맛없다며 투정을 부렸을 수도 있다. 아쉽게 되었다며 그녀를 위로하며 인터뷰 하는 기자. 하지만 전혀 아쉬운 표정을 보이지 않는 그녀의 모습. 희미하게나마 그녀가 웃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나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젯밤 그녀를 만날 때 입었던 상의 주머니를 뒤적였다. 나를 만나자 그녀는 "이거, 선물이야."라며 파란 블록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모든 게 명확해지는 느낌이었다. 난 그녀에게 전화가 걸고 싶어졌다. 그녀에게 편안히 기댈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결코 도미노 같은 게 아니니까.
강병규
심사평
건물들의 좁은 틈새로 검은 바람이 흘러들어왔다. 온몸에 휘감겨 한동안 떠날지 모르는 이 느낌들을 나에게 밀어 넣고 있는 것은, 내 눈앞에 군집을 이루고 있는 이 아파트다. 기분 나쁜 물건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역시 찝찝한 감상들일 뿐이다. 이 바람이 저들이 내뿜는 입김이라면, 저들이 죽을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애써 나무들로 가려 보이지 않게 하려하지만, 그들이 뱉어내는 썩은 기운은 지울 수 없는 흔적이며, 숨길 수 없는 본질이다. 항상 그렇게 느끼면서도 나는 그렇게 다 죽어가는 건물들을 향해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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