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사등록일 | 2009-05-12 |
|---|---|
| 개제호수 | 225호 |
조형국(문화콘텐츠학)
지금으로부터 110여 년 전 니체가 예언했고 최근에 역사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자신의 저서『역사의 종말』에서 다시 인용한 적이 있는 "따뜻한 마음이 없는 육욕주의자들"은 근대화, 세속화라는 이름아래 지난 세기동안 "초월(성스러움)"의 가치를 배제해 왔다. 그 결과 지난 20세기를 문명과 야만의 역사로 장식해온 인류는 이제 내팽개친 "초월"을 다시 회복해야함을 절실히 통감하고 있다. 파괴돼가는 생태계, 지구온난화, 기계화된 인간, 가정의 해체, 성스러움의 상실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문제들이 우리의 삶을 총체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그래서 비토리오 훼슬레는 그의 방대한 저서 『도덕과 정치(Moral und Politik)』에서 이러한 총체적인 현대문화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간관을 바탕으로 환경학과 경제학 그리고 이 둘을 현실적으로 조정하고 정책을 입안하여 실행할 수 있는, "살아있는" 생명정치학을 모색해야함을 역설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철학적 혹은 인문학적 반성은 무엇을 뜻하는가? 필자는 이러한 시대와 문명에 대한 반성의 한 관점을 현대철학의 거장, 하이데거 철학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특히 죽을 자로서의 인간이해와 그 인간의 거주함의 의미에 대한 하이데거의 생각에 대해 다시 한 번 곱씹어보고자 한다.
1. 현대문화적 삶의 논리
무한경쟁과 자본의 힘의 논리를 바탕으로 더 많은 희생양을 요구하는 현대문화적 삶의 방식 속에서 우리는 죽을 자로서의 거주함의 참뜻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가? 과학기술만능시대, 배금주의 그리고 실증주의적 사고방식에 물든 수많은 현대인들의 과학적 신앙이 종교적 신앙의 자리를 대체한 삶의 물결 속에서 죽을 자로서의 거주함의 참뜻을 되새기는 일은 한가한 자들의 소일일 뿐인가? 존재중심(無제거), 이성중심(영성배제), 인간중심(자연도구화)에 토대를 둔 근현대문명의 연장 속에서 펼쳐지는 오늘날, 우리들의 일상적 삶의 모습은 어떠한가? 21세기 새로운 디지털문명과 삶의 질을 운운하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한 트렌드 전문가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욕망의 지도를 스마트(친절한 테크놀로지), 청춘(시간의 멋진 역주행), 커넥팅(따뜻한 네트워크), 체험(날것에의 매혹), 위로(내 마음속의 보호막), 레벨업(더 사치스런 일상), 크로스브리딩(교배하는 세상) 등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욕망의 지도에 대한 분석들은 우리들의 몸의 욕망과 그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기술과 상품들의 세계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날 우리들의 삶의 세계는 날로 새롭게 진화해가는 디지털기술과 몸의 욕망의 환상적인 랑데부에 의해 열어 밝혀진 일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일상적 삶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물질주의와 소비주의 그리고 향락주의의 물결 가운데 몸의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다. 그 결과 진정한 웰빙은커녕 각종 질병과 인간성 상실 그리고 무사유(無思惟)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대해 하이데거는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지구상의 정신적 추락은 이와 같이 악화돼, 추락이라는 것을 그렇게 볼 수 있는 정도의, 그래서 그것이 그렇다고 규정지을 수 있는 마지막 정신적 힘마저 민족들로부터 앗아버릴 상태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단순한 주어진 사실에 대한 확인은 문명비관론이나 더욱이 문명낙관론 같은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세상은 음울해지고 신(神)들은 자취를 감추고, 땅은 파괴되고, 인간들은 부화뇌동(附和雷同)하고, 자유스럽고 창조적인 모든 것에 대한 가증스러운 의심이 이미 세상천지를 온통 휩쓸어, 도무지 비관론이니 낙관론이니 하는 아이들 장난과 같은 개념들은 이미 오랜 전에 웃음거리가 돼버리고 만 것이다"
필자는 위에 인용한 하이데거의 이러한 시대진단 혹은 인간 읽기를 한마디로 "고향상실(Heimatlosigkeit)"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현대인들은 사실은 죽을 자로서의 참다운 거주의 의미, 마음의 고향을 상실한 채 칠흑같이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2. 현대문화적 삶의 위기와
"최후의 인간"
필자는 오늘날 우리들 삶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이기적 개인주의와 왜곡된 성(性)문화 그리고 생명 죽임의 현실 등 다양한 삶의 위기들을 현대인들의 고향상실의 결과라고 본다. 삶의 중심가치인 정신의 고향을 잃어버린 채 오로지 물질적신체적 가치만을 성공의 척도로 삼는 삶의 결과 아니겠는가. 이렇듯 고향을 상실한 현대인들에 대해 필자는 ꡐ최후의 인간ꡑ이라고 불러본다. 물론 이 용어는 니체에 의해 사용됐으며 최근에는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에서 니체를 인용하며 썼던 용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역사의 종말기에 나타나는 최후의 인간은 어떠한 인간을 말하는 것인가?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ꡒ엄청난 문화발전의 최종단계에 기계화된 화석인간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ꡓ고 말한 바 있다. 그가 말한 화석인간은 정신이 없고 감정이 없는 육욕주의자를 뜻한다. 베버는 인류문명발전의 마지막 단계에 정신이 없는 전문가, 감정이 없는 육욕주의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봤던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 역시 『멋진 신세계』에서 이처럼 감정이 없는 육욕주의자들을 비슷하게 그린 적이 있다.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ꡒ우리는 행복을 발견하였다ꡓ, ꡒ우리는 행복하다ꡓ를 외치며 그러한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오늘 우리사회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우리 한국사회도 이제 비슷한 길로 접어들고 있는 것 같다. 우리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소위 ꡐ가치 있는ꡑ 것들로 돈, 건강, 외모, 쾌락, 정력을 얘기하고 있다. 성형외과를 찾아가 몸 전체를 뜯어고치고 있으며, 다이어트산업이 불황을 모르고, 비싼 화장품이 잘 팔리는 등 오직 외적인 것에만 신경을 쓰며 외적인 것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분위기가 드세다.『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에 나타난 에리히 프롬의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마치 누군가에게 잡아먹히기를 바라며 몸 가꾸기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들 또한 니체가 예언한 ꡐ최후의 인간ꡑ과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고 건강하게 받쳐주는 근원적인 관계를 상실한 ꡐ최후의 인간ꡑ들은 이제 다시 마음을 추스리고 새로운 삶의 길을 모색함으로써 희망의 역사를 써가야 할 것이다.
일찍이 휄덜린은 "위험이 있는 그곳에 그러나 구원의 힘도 함께 자라고 있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오늘 이 궁핍한 시대에 구원의 힘은 어디로부터 자라고 있는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정서적 우울과 형이상학적 허무감을 치유할 생명수는 어디에서 길어 올려야 하는가?
3. 21세기, 왜 하이데거인가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현대문화적 삶의 위기들은 한마디로 이성중심, 존재중심, 인간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계몽의 빛만을 자랑하며 일체의 ꡐ초월ꡑ의 가치를 배제하려고 애써온 서구 지성사의 결과이다. 세속도시적 삶을 세련되게 가꾸는데 온 힘을 쏟은 현대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자기상실, 가정의 해체 그리고 환경문제로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 고향을 상실해가고 있다. 이러한 상실자, 소외자, 방랑자들에게 하이데거에서의 죽을 자로서의 인간이해와 거주의 철학은 근원적 고향에로 되돌아갈 수 있는 이정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 2,500년의 지성사와 대결을 벌이며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던 하이데거는 후기에 가서 자신이 서있는 서양문명의 한계를 통렬히 비판하고 동양문화와의 대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라는 말로 슈피겔 잡지와의 인터뷰를 장식하고는 인간을 아예 "죽을 자"라고 명명하였다.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나 "신의 형상"이라는 보편적 정의로만 말하지 말고 인간 존재의 그 현사실성(Faktizit?t)에 맞게 죽을 자라고 보자는 것이다. 이는 바로 인간의 유한성을 철저히 자각한 데서 오는 깨달음일 것이다. 환상적인 디지털 기술과 육체적 욕망 채우기에 급급한 현대인들은 자신이 곧 죽을 자라는 사실을 잊은 채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채우는 일에만 온 정열을 쏟고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한다함은 권력이성으로 자연을 지배하고 환경을 인간의 욕망의 대상으로만 대하며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다. 죽을 자로서의 인간은 하늘과 땅 그리고 신적인 것들과의 거울놀이를 통해 펼쳐지는 사방세계(Geviert) 안에서 서로 살리고, 섬기고, 비우고, 나누는 삶의 정치를 통해 생명을 보살피고 평화를 증진시키는 데 기여하며 살 때 비로소 거주함의 참뜻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대지 위에서 인간으로 거주하는 일은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생명체들을 보살피고 신적인 것(성스러움)이 신적인 것으로서 드러날 수 있도록 예비하는 삶인 것이다. 이러한 삶은 특정한 종교인의 삶도 아니고, 특정한 민족의 삶도 아니다. 다만 성스러움과 인간성 회복을 통해 생명과 평화를 찾고자 하는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할 삶의 모델인 것이다. 언젠가 대화 중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하이데거의 행위가 필자에게는 선불교 선사의 행위처럼 느껴진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데 손가락에만 집착하는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과학과 기술문명 속에서 비대해진 우리들의 어깨를 내려치는 죽비를 들고 있는 서양의 선사, 마르틴 하이데거라고 말한다면 필자의 지나친 주관적 느낌일까.
